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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독립운동가들: 잊혀서는 안 될 영웅들의 이야기2/2

by bom@incheon 2024. 9. 28.

염성오님의 사진

인천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입니다. 오늘은 인천과 그 주변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 이어 오늘은 염성오, 유학용, 심혁성,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여섯 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염성오(廉成五): 강화도 3.1 만세운동의 주역

염성오 선생은 1878년 6월 4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반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강화도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유봉진과 함께 강화 만세운동의 수괴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9년 3월, 강화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염성오 선생은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염성오 선생은 1919년 5월 25일 강화경찰서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에 항소하여 1920년 3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염성오 선생은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활동은 강화도 3.1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2. 유학용(劉學用): 강화도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유학용 선생은 1896년 2월 28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반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염성오 선생과 마찬가지로 강화도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3월 18일, 유학용 선생은 강화읍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강화도의 독립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유학용 선생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1920년 4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5월 23일 만기 출소했습니다.

유학용 선생의 활동은 강화도의 3.1 운동이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줍니다.

 

3. 심혁성(沈爀誠):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

심혁성 선생은 1888년 8월 15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현재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천 지역에서 일어난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 심혁성 선생은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시장(황어장터)에서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시위는 부천 지역 3.1 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시위 도중 심혁성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군중들의 항의로 일시적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1919년 11월 19일, 심혁성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4월 10일 가출옥했습니다.

심혁성 선생의 활동은 인천과 부천 지역의 3.1 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4. 조명원(趙明元): 용유도 혈성단의 지도자

조명원 선생은 1901년 7월 2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용유도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919년 3월 23일과 24일, 조명원 선생은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이름을 '혈성단(血誠團)'이라 칭하고, 3월 28일을 거사일로 정했습니다.

혈성단은 큰 태극기를 만들고 4명의 이름을 각각 기입한 후, "4월 28일 독립운동 거행식을 관청리에서 갖고자 하오니 모두 모이도록 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들은 남북리,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등을 다니며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격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서 1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조명원 선생은 이 시위를 주도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했습니다.

이 활동으로 인해 조명원 선생은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6월 26일 만기 출소했습니다.

조명원 선생의 활동은 인천의 섬 지역에서도 3.1 운동의 불길이 타올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5. 조종서(趙鍾瑞): 용유도 혈성단의 또 다른 주역

조종서 선생은 1899년 8월 1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명원 선생과 함께 용유도 혈성단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조종서 선생은 조명원, 최봉학, 문무현 등과 함께 혈성단을 조직하고 3.1 만세운동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용유도 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3월 28일의 만세 시위에서 조종서 선생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혈성단 멤버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 활동으로 인해 조종서 선생은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습니다.

조종서 선생의 활동은 용유도의 3.1 운동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6. 최봉학(崔奉學): 용유도 혈성단의 젊은 투사

최봉학 선생은 1897년 3월 26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명원, 조종서와 함께 용유도 혈성단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최봉학 선생은 다른 혈성단 멤버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격문 작성과 배포, 그리고 3월 28일의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최봉학 선생은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습니다.

최봉학 선생의 활동은 젊은 세대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인천과 그 주변 지역의 독립운동가 여섯 분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염성오와 유학용 선생은 강화도에서, 심혁성 선생은 부천에서, 그리고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선생은 용유도에서 3.1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알아보았던 5분과 위에 열거한 6분 총 11분의 활동은 인천 지역의 3.1 운동이 단순히 도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강화도와 같은 섬 지역, 그리고 당시 부천군에 속했던 지역들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들의 나이와 직업이 다양했다는 점에서, 3.1 운동이 모든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는 전 민족적인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독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받아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들의 정신이 후대에 계승되기를 바랍니다.